17세기에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면서 영국인-인도인 공동체가 점차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. 영국과 인도의 혈통이 섞인 이 독특한 소수 민족 집단은 풍부한 문화와 언어적 특성으로 당시 사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. 식민지 시대가 진행되면서, 영국인-인도인 공동체의 형성은 식민지 통치, 대인관계 및 문화 통합의 복잡성을 반영했습니다.
영국-인도 공동체의 형성은 혼혈 가족, 특히 영국인 아버지와 인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가족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.
1690년경, 영국 동인도 회사가 칼카타에 기지를 설립했고, 이로 인해 곧 수많은 영국 상인과 군 장교들이 유입되었습니다. 결혼과 현지 여성과의 파트너십이 늘어나면서 영국인-인디언 공동체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. 역사 기록에 따르면, 당시 영국 남성의 약 3분의 1이 인도의 현지 여성과 결혼했습니다. 18세기 후반부터 이런 현상은 더욱 널리 퍼지면서 새로운 국가 정체성이 생겨났습니다.
기록에 따르면 1767년과 1782년 사이 캘커타 교회에 다니는 영국 태생 어린이의 54%가 영국계 인도인이었으며 합법적으로 등록되지 않았습니다.
인도에서 영국의 통치가 확대되면서, 영국인 인도인 공동체가 중요성을 얻게 되었습니다. 1857년 인디언 반란 당시 영국계 인디언들은 영국 정부를 지지하였고 많은 특혜를 받았습니다. 1919년에 이 공동체는 델리 중앙 입법부에서 예약된 의석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. 이를 통해 그들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복지와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.
기독교를 신앙으로 삼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영국계 인도인 공동체는 주변 인도 사회와 대조되는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.
앵글로-인도 공동체는 그들만의 교육 시스템과 사회 구조를 확립하고, 여러 사회 클럽을 창립하고, 매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 댄스 파티를 열었는데, 이는 그들의 문화의 일부가 되었습니다. 게다가 음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그들의 역할은 과소평가될 수 없으며, 특히 재즈와 래그타임 음악을 소개한 데서 그 역할이 두드러진다.
20세기에 인도 독립 운동이 고조되면서 영국인 인도인 공동체는 전례 없는 압박을 느꼈습니다.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영국 혈통과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사회적 수용이 낮아지면서 정체성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습니다. 많은 영국계 인도인들은 더 나은 기회와 새로운 땅에서 삶을 찾고자 영국, 호주, 캐나다 및 기타 영연방 국가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습니다.
독립 직후, 영국인-인도인 공동체의 인구는 1947년 30만 명에서 현재 약 125,000~150,000명으로 크게 감소했습니다.
시간이 지나면서 이 커뮤니티는 여러 면에서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었습니다.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-인도 문화는 다시 인정받고 기념되기 시작했으며, 심지어 국제적인 영국-인도 모임도 열렸고, 그들의 공동체 생활을 묘사한 많은 문학 작품이 출판되었습니다. 이러한 활동은 지역 사회 내의 응집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, 이 독특한 집단에 대한 외부 세계의 이해를 향상시킵니다.
오늘날의 인도 사회에서 영국인-인도인 공동체의 생활 조건과 사회적 지위는 이전의 영광으로 회복하기 어렵지만, 그들은 여전히 모든 계층에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. 특히 교육과 군대 분야에서 이 소규모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은 여전히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주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하고 있습니다.
사회의 변화와 문화의 통합에 따라, 영국-인도 공동체가 미래에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다문화 인도에서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을지 여부는 주목할 만한 주제가 되었습니다. ?